서유럽 건축
서유럽은 476년 서로마 제국이 몰락함으로 인해 대규모 건축을 진행할 지배 세력과 그에 따른 경제 활동의 뒷받침이 사라져 이렇다 할 건축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배 계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르만족 일부가 서로마 제국의 땅을 차지하고 왕궁이나 성곽, 저택 등을 짓고 살고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4세기부터는 황제와 기독교에 의한 소규모 건축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건축물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 당시 건축에 사용되던 건축 재료나 건축 기술이 비약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재료가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좋은 재료를 구할 비용이나 훌륭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섭외할 비용이나 지배 세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 나름 강한 집권 세력을 갖고 있었던 지배 권력은 서유럽 주변국의 이슬람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이 있었다. 특히 비잔틴 건축의 펜덴티브 돔은 나중에 서양 건축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서양 역사에서 그리스, 로마의 건축은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만 5~10세기에는 서유럽에 그렇다 할 건축물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 건축이 유럽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유럽의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이 지역에서는 국가체제가 생겨나면서 이들 중심으로 역사가 쓰였다.
몰락한 서로마제국
로마제국은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그 지역의 주민들을 노예로 삼고 그 지역의 생산물을 빼앗아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갔다. 서쪽으로는 잉글랜드,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했다. 하지만 동쪽은 정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땅을 넓혀가던 로마제국도 3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한계에 달했고 결과적으로 생겨나던 도시들의 건축도 멈추게 되었다. 화려했던 로마제국도 게르만족에 의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로마제국의 서쪽은 노예 제도의 균열로 빠르게 무너져 내렸지만, 오랜 문명이 발전하고 무역이 성행했던 튀르키예나 그리스 등의 동쪽 지역은 여전히 굳건했다. 서쪽 지역의 몰락은 지배 계급의 힘이 약해지면서 경제적인 뒷받침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를 건설한 비용도 부족해졌고 황제에게 받칠 공납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동방 지역 출신의 군인들이 힘이 세졌고 동방 달마티아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했다. 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동로마의 황제로, 니코메디아를 동로마의 수도로 정하고 밀라노를 서로마의 수도로 옮겼다. 콘스탄티누스도 동방 세르비아 출신이다. 그는 니코메디아에서 비잔티움으로 동로마의 수도를 옮겼는데, 비잔티움을 무역 거점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게르만의 지배
게르만족은 중앙아시아의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자 로마제국 국경 지역에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니벨룽의 노래]라는 작품은 437년 갈리아 지방의 부르군트 왕국이 훈족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과정이 담겨 있는 지크프리트의 신화를 소재로 한 영웅 서사시이다. 이는 게르만족의 침략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이뤄져 왔음을 시사한다.
그 당시 유럽은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를, 롬바드족이 이탈리아 알프스 남쪽을 점령했는데, 그중에서도 중부 유럽을 차지한 프랑크족이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작은 왕국들로 이루어졌던 프랑크족은 메로베우스왕조를 기점으로 5세기 말에 힘 있는 왕권 국가로 발전하였고, 6세기 초 서고트족을 갈리아에서 쫓아내고 부르군트 왕국을 통합하면서 유럽 중부를 차지했다. 7세기에는 피핀 가문이 유세를 떨쳤고 8세기 초에는 프랑크 전 지역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슬람 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후에도 피핀 가문은 이슬람의 영향에서 유럽을 보호해 서유럽의 주된 정치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지배 세력이 되었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며 도시는 발달하지 못하고 상업 활동이 줄어들며 되려 농촌화가 확산되었다. 땅으로 바다로 교류하던 거점들이 사라지고 동방과 로마 제국 지역 같은 교류도 줄어들었다. 결국 도시의 규모가 줄어들게 되고 건축 또한 이뤄질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남안 북부 아프리카를 포함한 아라비아반도에서 이베리아반도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서유럽 지역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프랑크왕국은 이슬람 세력을 막기 위해 봉쇄에 가까운 대처를 하였다. 다행히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의 이슬람 항구도시가 있어 무역이 가능했다. 이런 봉쇄는 1095년 십자군 전쟁에 비롯해 풀려나기 시작했다.
봉건제 형성
서유럽의 이런 갇힌 형세에 도시들은 쇠퇴하고 무역과 같은 상업적인 교류도 줄어들고 거의 자급자족의 농촌 지역이 남아 있었는데, 이런 농촌 지역마저 게르만족의 점령으로 분권적 봉건제라는 것이 생겨났다. 게르만족이 침략해 오자 서로마의 농촌 사회에서는 노예제도가 흔들려 크게 휘청이게 되고 지주들은 토지를 가진 노예들을 자영농으로 만들었다. 이는 농산물을 공납 받는 대가로 노예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1세 시기에는 토지가 없는 노예의 매매를 금지할 정도로 노동력이 줄어들었다. 게르만족이 침략한 이후에 노동력과 수확물을 빼앗기는 것은 더욱이 당연한 것이었다.
중앙집권 체제였던 프랑크왕국 카롤링거 왕조는 군주에게 신하가 토지를 주는 형태의 봉신 제도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그 지역의 사법권과 군사, 조세까지 같이 나눠 주었다. 봉건제는 고대 중국에서도 시행되었지만 이는 실세가 아닌 행정상의 권력에 불과했고, 중세 유럽에서의 봉건제는 분권적으로 군사 세력의 계약으로 성립된 것이었다.
로마 기독교와 교회
게르만족과 로마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외의 서로 상품을 사고파는 교류는 존재했다. 게르만족에게 로마의 것들은 자신들의 것보다 여러 면에서 앞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로마와 그리스에는 사도 바울을 통해 1세기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지배 계급에 의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후에는 로마의 지배 계층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로마의 여러 도시에는 지하교회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정 교회당이 생겨났다. 게르만족의 침략 이후에도 기독교 신자들의 증가는 계속되었고, 심지어 영향력이 커진 지배 계급 기독교인들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정책까지도 바뀌게 될 정도였다. 결국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기독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되었다.
기독교가 정식 종교로 인정되자 로마의 행정단위에 따른 교구가 재정되어 교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로마의 귀족들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지배하던 속주들이 자신들만의 교구를 만들어 여러 개의 교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로마의 소수 지식인들이 교회에서 사제 집단을 이뤘는데 이는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귀족 계층과 성직자들 뿐이었기 때문이다.